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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배희관 뮤지션, 배희관밴드 리더

“남이 아닌, 나를 살리기 위해 음악을 한다”

글. 차우진 대중음악평론가

 

배희관은 평창 패럴림픽 폐회식 공연으로 유명해졌다. 여기서 그는 자작곡인 <존재감>과 에일리와 함께 신해철의 <그대에게>를 불렀다. 몇 년 전 KBS의 ‘탑밴드’에도 ‘4번출구’라는 밴드의 멤버로 출연했고, 솔직한 인터뷰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유튜브에서 배희관을 검색하면 이 영상들과 함께 ‘시각장애인 뮤지션 배희관’에 대한 각종 영상이 나온다. 하지만 그래서 그가 더 궁금해졌다. 배희관이라는 음악가는 ‘시각장애인’이라는 말로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든 그렇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나를 ‘이성애자 차우진’이라고 소개한다면, 도대체 그게 나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개인, 특히 창의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을 움직이는 건 다름 아닌 욕망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궁금했다. 배희관이라는 음악가의, 그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욕망이 무엇인지. 더불어 여러 영상을 보는 동안 그를 제대로 보고 싶어졌다. 매우 짧은 영상에 찍힌 그에게서는 뭔가 다른 것,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매력’이라고 부르는 어떤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건 대체로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이 가진 것이니까. 그래서 12월의 어느 일요일 오후, 그의 작업실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사실, 어쩌면 우리는 그를 전혀 몰랐던 셈이다. 

 

 

프로필에는 2003년 호주에서 열린 ‘와타보시 뮤직 페스티벌’을 계기로 활동을 시작했다고 쓰여 있다. 어떤 행사였나?

음, 그게 시작은 아니었고, 음악을 접한 계기는 정확히 11살에, 맹학교에서 만난 드러머 선배에 대한 동경으로 시작되었다. 어깨너머로 드럼을 배웠는데, 그가 유학을 가면서 브라스 밴드에서 스네어 드럼을 치면서 시작되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친구들과 노래도 자주 불렀는데 그걸 눈여겨보던 선생님이 ‘와타보시 뮤직 페스티벌’에 출전할 한국 대표로 파라다이스 복지재단에 우리를 추천했고, 운 좋게 선발되었다. 작곡가가 만든 노래로 출전했는데 대회가 아니라 예술제였다. 그때 한국과 호주의 공연 문화가 참 다르다고 느꼈는데, 누구나 쉽게 공연장에 와서 음악을 즐길 수 있는 분위기가 신선했다. 

그렇게 공식적인 무대에 서면 음악을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었을 것 같은데.

그즈음에 컴퓨터 음악에 입문했다. 소프트웨어도 장비도 열악했지만, 내가 연주한 음을 쌓으면 음악이 되고, 거기에 내가 가사를 붙여 부르면 노래가 되더라. 그 재미가 있었다. 마침 신해철 노래에 심취했던 때라서 그의 음악처럼 메시지가 담긴 노래를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음악을 갖고 놀다가 자연스럽게 어떤 페이지로 넘어간 것 같은데, 밴드를 하게 된 계기는? 

사실 밴드에 대한 생각은 없었다. 그저 내 노래를 혼자 만드는 거로도 만족했으니까. 가수의 꿈이 아니라 그냥 취미로 음악을 쭉 해나갈 수 있는 기반이어도 족했다. 그랬는데, 스물네 살 때, 초임 교사 발령을 받으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처음으로 내가 스스로 돈을 벌게 되니까 악기, 음악 욕심도 생기더라. 그때 ‘4번출구’라는 밴드가 나를 알게 되면서 연락이 왔다. 기타 자리가 비는데 같이 밴드 해볼래? 그렇게 밴드를 시작했다.

원래 드럼이었는데 기타를? 아니 그보다 교사였나?

사실, 모든 음악의 동기는 여자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아닌가? (웃음)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잘 보이려고 아는 형에게 기타 코드 잡는 걸 배웠다. 그랬더니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도 따라 칠 수 있더라. 와, 이거 재밌는 악기구나! 그러면서 혼자 기타를 연구했다. 그때가 2000년대 초반이라 트랜스픽션, 체리필터 같은 밴드들이 유행할 때였고, 그 음악을 들으면서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교사가 된 건, 사실 나는 대학에 갈 생각이 없었는데……. 맹학교의 커리큘럼이라는 게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는 입시가 아닌 안마와 침술 같은 생계형 기술에 집중된다. 당연히 나도 그걸 열심히 배웠는데, 안마계의 서태지가 되어서 음악도 계속 하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던 것 같다. (웃음) 그런데 고3이 되었을 때, 어머니께서 처음으로 내 앞에서 우시면서, 나는 네가 선생님이 되면 좋겠다고 하셨다. 나를 키우시면서 어떤 마음이셨을지 짐작이 가는 입장에서, 그 말을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뒤늦게 공부를 시작해서 어찌어찌 대학에 합격은 했다. 그리고 임용고시까지 봤는데, 사실 기대하진 않았다. 부모님도 마찬가지지 않으셨을까. (웃음) 그런데 또 운 좋게 붙어버려서 교사가 되고, 어머님은 안심하고 만족하셨던 것 같다. 그런데 그런 애가 갑자기 ‘탑밴드’에 나오니까……. (웃음)

부모님께 ‘탑밴드’는 얘기 안 했던 건가? 

안 했다. 당연히 나가지 말라고 하셨을 거라서. 부딪칠 거라서 피했다. (웃음) 그런데 방송 후에 어머니가 전화하셔서, 도대체 학교는 어쩌고 거기에 나갔느냐고 엄청 뭐라고 하셨다. 지금은 그때보다는 좀 덜하신데, 사실 장애를 가지고 사회생활을 하는 게 쉽지 않다. 핸디캡도 있는 입장에서는 뭔가 특별한 무기랄까, 그런 게 하나쯤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내게 음악이 그런 역할을 한다는 걸 이해하신다. 덕분에 나는 학교에서도 음악으로 소통하고, 애들과 예능제에도 나가고, 나와 같은 아이들에게 나는 조금 다른 선생님으로 보이기도 하고. 그래서 학교에서도 지원하는 경우도 있으니 부모님 입장에서는 괜찮다고 생각은 하시는 것 같다. 물론 둘 중 어떤 게 먼저냐 하는 고민은 있지만.

운이 좋았다고는 하지만, 은근히 ‘스웩’이 있다. (웃음) 

나는 사실 복 받은 경우다. 부모님 말씀 듣길 잘했다는 생각도 하고. 물론 병행하는 게 힘들기도 하고 이런 입장에서 생기는 고민도 있지만. 

 

‘탑밴드’에 ‘4번출구’로 나왔지만 결국 자기 밴드를 하고 있다. 어떤 고민이었을지 궁금한데.

‘4번출구’ 활동은 여러모로 ‘장애’가 먼저 이해되는 밴드였고, 그러다 보니 레퍼토리 위주로 공연과 행사를 하는 경우가 많아서 힘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4번출구’를 나왔고, 그다음에 <존재감>이란 곡을 썼다. 그때 내가 하려는 밴드, 팀의 색깔도 정리되었다. ‘시각장애인인데 음악을 좀 하네’가 아니라 ‘음악이 좋은데 알고 보니 시각장애인이네?’ 같은, 음악으로만 이해받고 존재할 수 있는 밴드를 만들고 싶었다. 

 

 

‘인디’로 분류되는 음악가들도 비슷한 고민을 하는데, 궁극적으로 프로페셔널이 되어 자기 퀄리티를 높이고 싶다는 욕망인 것 같다. 

퀄리티보다는, 사실 ‘장애인 뮤지션’이라는 게 특징적으로 섭외하기엔 좋겠지만, 정작 나로서는 그런 꼬리표를 떼고 평등하게 페스티벌, 공연에 섭외되고 싶은 거다. 내가 하는 음악은 남을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를 살리기 위해서니까. 

<존재감>이라는 곡이 그런 내용을 다루지 않았나? 

솔직히 처음에는 ‘교사’라는 직업도 음악을 위한 부업이란 생각도 했다. 그런데 이제 내게는 아이들도 정말 중요하다. 내가 아이들에게 좋은 자극이 되리라는 생각도 들고. 음악과 교직, 둘 중 어느 게 중하다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일이 되었다. 

 

그런 아이들과 기억할 만한 순간을 꼽는다면?

너무 많지만, 딱 하나를 꼽자면 처음으로 아이들과 공연을 했던 순간이다. 발달장애 아이들과 함께 난타 수업을 진행하고 공연을 했는데, 학부모들의 반응이 남달랐다. 발달장애 아동의 학부모들은 중증으로 갈수록 이런 수순을 밟는다. 초등학교 때엔 희망을 품는다. 중학교에 가면 그걸 서서히 놓는다. 고등학교에 가면 그저 하루하루 무사히 보내는 게 중요해진다. 그런 부모님들이 공연이 끝나고 우리 아이가 그렇게 빛이 날 줄 몰랐다고 내게 얘기해줬다. 박자도 음정도 안 맞는 공연이었지만, 아이들이 사람들 앞에서 자신 있게 뭔가를 해낸 것 자체가 감동이었다. 그때가 내게도 큰 전환점이 되었다.

어떤 전환점인가?

아까 말한 대로,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는 계기랄까. 아직 멀었지만, 마음가짐을 다르게 먹게 되었달까. 

그럼 본인의 무대 중에서 인상적이던 순간은 언제였나?

그것도 하나 꼽을 수 있다. ‘4번출구’ 활동 당시 선덕원이라는 여자아이들만 있는 보육원에서 공연을 했는데, 공연이 끝나고 어쩌다 보니 아이들과 대화도 나누고 악기도 소개하면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때 궁극적으로 큰 무대란 건 규모가 아니라 그 누군가에게 평생 잊지 못할 공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때를 계기로 누군가의 인생에 기억에 남는 공연, 음악을 하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되었다. 

<존재감>이란 곡도 그렇고 영향력을 갖고 싶은 건가? 

갖고 싶다. 세상에 쓴소리를 던지는 그런 영향력 말고, 사람들이 포기하지 않고 걷게 만드는, 꾸준하고 지속적인 영향력. 

그런 맥락에서 배희관의 욕망은 뭘까? 

사실 나는 성공하고 싶은 마음보다는 천천히, 한 곡 한 곡 음악을 발표하면서 죽는 날까지 음악을 하고 싶다. 물론 이왕에 꿈을 가진다면 아주 거대하게, 오랜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이 들을 만한 음악을 만드는 게 꿈이라면 꿈이겠지만. 그보다는 나와 비슷한 상황에서 음악 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싶다. 장애가 있고 없고를 떠나, 늘 새롭게 음악을 연구하고 발표하고 활동하다가 죽은 사람이 되고 싶은 거. 누군가가 나를 모티브로 삼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런 욕망이 있다. 

 

배희관에게 그런 사람은 누구인가?

무척 많지만, (웃음) 음악을 포기하지 않게끔, 내게 우상 같은 사람은 단 한 명이다. 신해철. 평창 무대 선곡을 할 때 사실 에일리 씨가 <그대에게>란 노래를 모른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그걸 꼭 불러야겠다는 생각에 절대 바꾸지 않았다. 

신곡 작업은 어느 정도 진행되었나?

내년 3월 전에는 발매할 예정이다. 사실상 레코딩만 하면 되는데, 4곡을 생각하고 있다. 이번 앨범에는 <마이너스의 노래>라는 곡이 있는데, 수능을 보는 아이들을 보면서 쓴 곡이다. 고3이면 모두 수험생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그 안에는 공부에 생각이 없거나 다른 꿈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거다. 그들은 소수지만 분명히 존재할 테니까, 그런 존재들을 모으는 노래다.

 

마지막으로, 장애인으로서 음악 공연 환경에 대해 할 말은 없나. 음악 공연장은 아직까지는 배리어프리 같은 환경 개선이 부족한 것 같은데.

접근성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호주에서의 경험도 있었지만, 한국의 공연장은 찾아가기에도 힘들고, 계단도 많다. 보편적으로 누구나 접근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부족한 것 같다. 시각장애인을 염두에 두면 자막, 수화, 진동스피커 같은 장치가 있으면 좋긴 하겠지만, 사실 음악 공연은 나름의 방법으로 즐길 수 있다. 소리와 분위기가 중요하니까. 그래서 일단 접근성을 가장 중요하게 꼽고 싶다.

 

배희관

배희관 
뮤지션, 배희관밴드 리더(보컬, 기타), <존재감> <so nice> 외 다수 작사·작곡
2003  호주 와타보시 뮤직 페스티벌 출전
2010  일본 골든 콘서트 심사의원 특별상
2011 ~ 2013  시각장애인 밴드 4번출구 보컬, <Story of 4번출구> 콘서트(강남구민회관, 용산 독각귀홀),
                        ‘찾아가는공연’ 및 재능기부 공연 30여 차례
2012  4번출구 KBS ‘탑밴드’ 3차 예선 통과, 페스티벌 나다 및 일본 골든 콘서트 참가
2013  배희관밴드 결성
2017 ~ 현재  대전혜광학교 특수교사
www.facebook.com/bhgband/

차우진

차우진 
대중문화평론가. 1999년부터 꾸준히 음악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음악웹진 [WEIV]를 비롯해 [씨네21] [한겨레21] [GQ] [NYLON] 등의 매체에 기고하며 활발히 활동해 왔다. 현재 스페이스오디티에 합류해 새로운 음악콘텐츠 제작에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는 『자전거, 도무지 헤어나올 수 없는 아홉 가지 매력』 『아이돌』 『한국의 인디레이블』 『청춘의 사운드』 등이 있다.  
www.facebook.com/woojin.re

 

영상. 박유미 미술작가 

사진. 이재범 POV스튜디오

공연사진 제공. 배희관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