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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우리가 만난 장애 예술의 빛나는 순간

솟구치는 가능성과 스펙트럼에 주목하라

정리. 프로젝트 궁리

개요
일시
2019년 1월 9일(수) 오후 4시~6시
장소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3층 세미나실
참석자
안경모(연출가, 좌장), 김남수(안무비평가), 성무량(공연기획자), 송현민(음악평론가), 최창희(감성정책연구소 소장)
 
 
 

섬광처럼 스쳐 가는, 솟구치는 시간

안경모  장애 예술의 예술적 가치를 조명하고 새로운 시도를 응원하고자 웹진 [이음]에서 올해 첫 기획 좌담을 마련했다. 참석하신 분들 모두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이하 ‘장문원’) 평가위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장애 예술작품을 경험하셨을 것이다. 2018년 장애인 예술 작품의 경향과 앞으로 새롭게 시도되길 바라는 것까지 차례로 이야기를 진행해보자.

 

김남수  ‘장애 예술’이라는 표현이 낯설다. 장애 예술이든 무명의 예술이든, 아직 형식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장애인이 연관된 어떤 공연을 접할 때 예기치 않게 결코 쉽게 흘려버릴 수 없는 어떤 현상이 발생할 때가 있다. ‘수직적 시간성’이라고 해야 할까? 섬광처럼 스쳐가는, ‘솟구치는 시간’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공연을 볼 때 보통 수평적 시간이 흘러가는데 이는 완성된 서사로서 유장하게 우리 의식과 접속된다. 소위 장애 예술에서는 완성도와 무관하게 수직적으로 출현하는 순간이 훨씬 강하다. 웰메이드 형식을 갖추고 있지는 않지만,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 주목하지 않으면 다 사라져버리고 우리 비평적 담론의 장에서 한 번도 다뤄지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올해 아직 정립되어 있지는 않은 소위 ‘장애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그런 시간의 편린 같은 것을 만난 것 같다.

안경모  20세기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이 예술 대상에 대한 표상을 추출해내는 식의 접근이었다면 장애 예술에서는 현존 자체가 그대로 드러나는, 현존을 그대로 목도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는 말씀으로 이해된다. 

최창희  작년에 광주시민문화회관에서 본 공연에서 뇌병변 장애를 가진 배우가 대사를 하는데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 자막이 나왔다. 우리가 외국 공연을 볼 때도 자막을 읽으면서 보잖나. 그 순간 완벽히 대사를 외우고 정확히 발성하는 게 필요한가 하는 의문을 느꼈다. 여기서 소통의 문제, 예술의 문제, 기술의 문제가 제기된다고 본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라도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는데, 몸짓과 대사와 자막을 같이 보는 과정에서 그러한 문제를 한꺼번에 제기한다고 생각했다. 작년 말에는 케인 앤 무브먼트의 <룩스(Looks;)>에 척추갈림증을 가진 일본 무용수가 출연했는데, 예술은 무엇인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이 모든 것을 다 질문하게 만들었다. 기존에 가졌던 모든 가치체계를 다 흔들었다고 생각한다.

성무량  장애인 예술 분야에는 경연대회가 많다. 사회 전반적으로 장애인 예술에 관심을 갖지 않다 보니, 장애 예술가에게 상을 주어 인정해 주고, 1등을 하면 장애인 행사에 초청해주는 식이다. 주최 측에서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러한 행사에서 ‘빛나는 순간’을 본 적이 있었다. 한 행사장에서 시각장애인 바리톤이 굉장히 딱딱하고 경직된 상황 속에서도 눈을 감고 <향수>를 부르는데, 그 순간 정말 노래에만 집중하는 모습이 제가 여태껏 들어 본 <향수> 중에 제일 감동적이었다. 자기 순서가 끝나고 나왔는데도 옆에 서서 다른 사람 노래에 박자를 맞추며 즐기고 있었다. 만약 그 사람이 시각장애인이 아니었다면 관례가 있으니 조용히 있었을 거다. 장애인이 갖고 있는 시각, 청각, 육체적인 장애가 다 다르겠지만 그걸 분류하기보다 그 속에서 제일 자연스러운 형식으로 갈 때 작품이 더 잘 나올 가능성이 커진다고 생각한다. 

안경모  장애 예술 활동에 있어서 많은 부분이 ‘비장애인과 다르지 않다’고 도전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상황이다. 방금 말씀하신 부분은 상실된 감각으로 인해서 또 다른 감각이 활성화되어 우리에게 초감각적 역할로서 예술계에 파열을 만들어주는 지점들이 아닐까?

 

성무량  경연에서는 ‘장애인도 비장애인처럼 잘할 수 있다’라는 틀을 못 벗어나는 것 같다. 내가 다르다는 걸 드러내는 순간, 그건 차별이 되기 때문에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안경모 선생님이 말씀하신 초감각적인 것들을 누군가가 해석해주고 북돋아 줄 수 있는 비평이나 장치가 당분간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송현민  사회적으로 청년, 장애인, 소수자에 대한 배려나 제도 개선의 분위기가 커지고 있는데, 특히 2018 평창 동계패럴림픽이 장애인 예술에 있어서 어떤 작은 폭발점, 인화점이 됐던 것 같다. 작년에 정말 많은 작품을 봤다. 그중 시각장애인 음악가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인 한빛예술단이 인상적이었다. 지휘자의 사인은 철저하게 시각의 영역인데 이걸 보지 못하는 거다. 그래서 귀에 안 보이게 꽂은 이어폰으로 지휘자의 지시가 연주자에게 전달되고 음악을 맞춘다. 그들만의 방법으로 보완해서 기술과 실력을 표현할 수 있는 단체로 성장해왔다. 이러한 방식이 다른 단체에 영향을 주고, 더 나은 방식을 연구한다면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류 예술을 파열하고 전복하는

안경모  한편으로 장애 예술을 바라보는 시선의 스펙트럼이 너무나 넓다. 대체언어가 있는 경우에는 그걸 장애 예술이라고 할 수 있나? 우리가 장애라고 굳이 진단하지 않아도 되는 영역까지도 한 덩이로 묶어버림으로써 그 규정이 더 혼돈스러워지는 것 같다.

 

최창희  한국사회에서는 장애인이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기 어렵다. 장애 예술의 사회적, 시대적 역할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편협한 사고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는 범주, 이 모든 것들을 확장시키는 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랑시에르는 “예술은 예술이면서 예술이 아닌 한에서 예술이다.”라고 했다. 예술은 기존에 있는 사물의 새로운 가치를 발굴해 내는 것이라는 의미다.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 기존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아주 편협한 가치와 틀을 깰 수 있는 폭발적인 에너지를 갖고 있다는 부분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 장애 예술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더 폭넓은, 인간 전체, 인간을 넘어선 자연, 우주까지 포괄시킬 수 있는 개념의 눈을 열어주는 계기를 만들어 줄 거라 생각한다.

김남수  올해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봤는데, 어떤 경우 장애인들이 자신의 몸의 본질을 파열과 순진성으로 출현시켰다. 그 출현의 순간이 솟구쳤다고 표현된 것인데, 그게 너무 아름답고 좋았다. 공연이라는 형식은 잘 만들어야 된다는 사회적인 압력이 있기 때문에 제도화 되어 있고 여며져 있다. 그런데 장애 예술가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걸 찢어버리는 거다. 우리가 만들려고 하는 맥락을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깨트린다. 제주에서 뮤지컬 <바리스타즈>라는 공연을 봤는데,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이 노래를 하고 뇌병변 2급 장애를 가진 배우는 무표정으로 서 있다가 가끔 대사를 한마디씩 한다. 그때마다 자연화된 언어를 거의 뭉갠, 분절화되기 이전의 더미의 언어를 쓰고 있는 거다. 쌍둥이 바리스타도 장애가 심한데, 걸어 나와 한두 마디 정도의 대사를 어렵사리 소화한다. 다른 배우들도 한두 가지씩의 그런 핸디캡으로 우리가 아는 코드와 맥락을 제거해준다. 그런식으로 탈코드되고 탈맥락화된 광경이 다 조합되고 연출된 것이 너무 신기하기도 했고, 결국 작년에 봤던 모든 공연들 중에서는 단연 최고의 공연이었다. 우리가 아는 예술은 책 속의 예술, 교과서를 중심으로 학습된 모더니즘 예술인데 그런 재현의 방식이 아니라 예술의 기원으로서의 원점으로 갈 수 있다는 거다. 이것이 사회적으로 거대한 피드백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라고 본다.

 

안경모  신체적 한계, 제한성, 감각상실의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서 대상화되었던 부분이 공연 또는 여러 가지 문화예술 속에서 주체로 내세워지고, 나서게 되는 과정 속에서 기존에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는 없었던 영역들을 자극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씀인 것 같다.

 

김남수  형태, 색, 선, 면, 이런 식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굉장히 복잡화된 삶의 질서를 단순한 형태로 환원시켰을 때 얻는 확장성이라는 게 있다. 장애인들의 신체는 감각의 형태에서 확장성을 가진 제한적인 몸짓을 보여주는데 우리가 그걸 알아차릴 수 있는가를 질문하고 싶다. 즉 극도의 제한성이 오히려 고도의 억제 속에서 깜짝 놀랄 만한 확장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안경모  연극 쪽 몇몇 극단에서 보이는 현상이 있었다. 누가 봐도 이 작품은 희곡을 쓸 때 비장애인을 전제로 쓴 것 같은데, 이걸 장애를 가진 분들이 그대로 수행하는 거다. 요즘에 다양성이라는 범주로 사회·문화·정책적인 부분이 확장되고 있는데, 나 스스로 얼마나 시선이 좁았는가를 자극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어떤 대사를 진행하는데 단어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짧은 멈춤[pause]이 생겼고, 그 멈춤은 온전하게 그 사람과 관객이 교류하는 순간으로 확 바뀌게 되었다. 장애 예술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시대적 역할이 기존에 없었던 인간에 대한 관점을 확장시켜 주고 예술에 대한 관점을 바꿔주는, 기존에는 장애 예술을 대상적인 관점에서 접근했다면 이들이 지금 주류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비장애 예술을 계속 파열시키고 열어주는 전복의 순간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성무량  장애인뿐 아니라 어떤 소수가 예술 안에서 새로운 계기[momentum]를 만들 가능성이 있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쉽지는 않다는 생각이다. 그만큼 더 많은 지원과 더 많은 시간을 줘야 하고 그 방식이 달라야 할 것이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삐져나와 원초적인 것을 건드리는 계기가 생기고, 더 많은 실험과 작업을 해서 양적으로 쌓여야 한다. 한편, 장애인 예술은 뭔가 더 감동이 있어야 한다거나 혹은 더 연민을 갖고 봐야 한다고 가정하고 있지는 않은지 다시 확인해 봐야 한다. 그것이 오히려 다른 방식의 대상화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공연에 대한 감흥이 없어진다. 장애인이 갖고 있는 잠재력은 염두에 두고 계속 응원하되, 지금 일어나고 있는 행사 또는 공연에서 정형화되고 박제되어 있는 부분들을 과감하게 비평해 줘야 할 것 같다.

 

최창희  하루아침에 바뀔 것 같지는 않고 균형을 맞춰가며 나아가지 않을까? 성장하는 과정의 하나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표현의 한계 vs 새로운 가능성

성무량  2000년대 초반부터 영국 하트앤소울(Heart n Soul), 호주 백투백씨어터(Back to Back Theatre), 제롬 벨(Jerome Bel)이나 클레어 커닝험(Claire Cunningham)의 작품 등을 보면서 작업 방식이 매우 특이하고 동시대의 문제를 자기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본다고 생각했지 장애 예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주로 장애인들과 비장애 연출가가 함께 한 작품이 많았던 것 같다. 백투백도 다운증후군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체 생활을 하는데 메인 연출가는 비장애인다. <스몰 메탈 오브제(small metal objects)>라는 작품은 자본주의에 대해 굉장히 다른 방식으로 신랄히 비판한다.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특이하고 실험적인 형식이기는 했지만 만약 장애인이 하지 않았으면 그렇게까지 우리에게 울림을 주지 못했을 것 같다.

 

안경모  시각장애 음악가의 경우 청각이 발달되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뛰어난 음악성을 구사하는 경우가 있다. 그 사람을 시각장애인이기 때문에 장애 예술가라 진단하는 건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건 정책 계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장문원에서 굳이 지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 공연도 있었다. 언어적인 소통에 아무런 한계가 없는 장애가 있는 연출이 극작하고 비장애인 예술가들을 무대에 세우고 오퍼레이터 등 몇몇 장애인으로 참여율을 맞춰 지원받고 공연하는 거다. 이 사례는 분명 지원 제도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결국 우리 사회에서 장애 예술이라는 영역이 어떤 스펙트럼으로 존재하는지에 대한 진단까지 나오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최창희  그런 점에서 제도적, 정책적인 한계가 있다. 우리 사회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심한 상황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제도를 보완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성무량  장애인이 가진 여러 가지 특성을 확장해서 보여주어야 장애 예술이라 할 수 있다. 단지 장애인들이 참여한다고 장애 예술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비장애인이라 할지라도, 작품에 장애인이 한 명도 안 나와도, 우리가 갖고 있는 장애인에 대한 시각을, 혹은 다른 무엇을 깰 수 있다면 그것은 충분히 장애 예술이라고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창희  장애인 예술과 장애 예술은 다른 개념인 것 같다. 장애 예술을 독립된 장르로 볼 수 있다는 가능성 속에서 시대적 역할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현재의 제도나 정책은 장애인 예술 지원에 있다. 하지만 장애인 예술이라고 하더라도 앞서 논의한 내용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나다페스티벌에서 암전 공연, 수어 공연 등을 통해 장애에 대한 체험뿐만 아니라 새로운, 확장된 감각 체험을 할 수 있는 자리였다. 장애인도 함께 어울려 예술을 체험하고, 비장애인 관람객도 새로운 관람 환경을 경험하게 되고, 공연한 예술가도 예술의 영역을 확장시킨, 모두가 새로운 경험을 나눈 공연이었다. 이런 자리가 만들어지는 것이 지금 장애 예술이 우리 모두에게 던져주는 시사점이 아닌가.   

 

장애 예술, 개념이 아닌 실천으로

김남수  한 가지 큰 몫은 아무래도 교육인 것 같다. 교육을 다르게 얘기하면 치유와 극복이다. 저도 처음에는 컨템포러리 입장에 있으니 이 교육적 입장의 관철에 대해 공박을 많이 했었지만, 차츰 알아차리게 되는 것은 치유, 교육, 극복 같은 것을 무시할 게 아니었다. 어느 날 교육 현장에 서 보니 그 사람들이 겪고 있는 것은 삶의 문제였고 그게 많은 장애인들에게 필요하더라. 그런가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런 교육의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운 형태의 예술 현장[scene]도 만들어질 수 있을 거다. 이는 교육과 예술을 섞지 않는 것, 둘을 구분 짓는 전략이 필요하지 않을까?

 

안경모  시민 활동으로 장애인 예술과 전문 예술 활동으로서의 장애 예술이 가진 스펙트럼이 아마추어리즘에서 프로페셔널까지 넓은 상황인데, 대체적으로 아마추어리즘적인 경향의 한계 속에서 만들어진 부분들이 크다고 생각한다.

 

송현민  장애 예술가들은 실제로 정보가 너무 없다. 지원금을 받으면 일종의 ‘쿼터제’ 같은 제도를 도입하여 다른 장애인 예술단체는 어떻게 하는지 동향 파악을 의무적으로라도 하도록 했으면 좋겠다.

 

안경모  개별 단체는 한계가 있다. 비장애인 시선에서 모든 걸 스스로 네트워킹해보라는 것 자체가 다소 제한적인 부분이 있을 것이고 장문원이 해야 할 역할에 대해 말씀해 주신 것 같다. 웹진도 배리어 프리(barrier free) 같은 방식으로 더 확장되어 장애를 가지고 예술 활동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고립된 느낌보다 함께하고 싶다는 자극을 주면 좋겠다.

 

성무량  이런 많은 문제들이 한꺼번에 풀릴 수는 없겠지만, 장문원이 긴 호흡으로 새로운 담론과 함께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예를 들어 지금 협회 중심의 사업도 전문 기획자들이 대거 양성되면 개선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기획자들이 많이 생기면 협회 중심이 아니라 단체 중심으로 좀 더 쉽게 정보에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송현민  장문원을 통해 장애인 문화예술의 전문적인 장이 희미하게나마 형성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장 안에서 다양한 노선을 통한 소통보다는 어느 단체와 평가위원, 혹은 한 단체와 기관 담당자들로 진행된 단방향의 소통이 더 많은 것 같다. 같은 장르 안에서 여러 예술단체가 소통하며 이 장이 튼튼해지길 바란다. 그런 흐름을 형성하는 것이 장문원이 할 수 있는 기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또한, 장애 예술의 정의와 담론이 장애 예술가들과 호환이 잘 안 되고 있다. 올해는 이런 것들의 균형을 잡아가는 해가 됐으면 좋겠다. ‘장의 형성’과 ‘새로운 장을 위한 재설계’가 올해의 화두가 되었으면 한다.

 

성무량  장애 예술에서 치유적인 부분과 전문적 예술 활동은 다르게 평가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것을 하나의 잣대로 평가하면 모호해지는 탓에 도움이 되기 힘들고 대상화되기 쉽다.

 

최창희  장문원을 중심으로 장애 예술에 대한 개념부터 용어의 사용까지 정의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면 좋겠다. 또한, 장애인 예술단체에 컨설팅 기능이 필요하다. 장애 예술 지원에 대한 제도적인 문제와 장애 예술에 대한 실험적 활동 및 학술적 논의까지 장문원이 해야 할 일이 많을 것 같다.

 

송현민  현장에서 지식을 유통시키고 생산하는 저희가 조금 더 의미를 얹어주고 인문적인 자세를 입혀주는 연결고리가 있으면 좋겠다. 장애 예술가들은 그들이 하는 것을 극복의 문제로 보고 계속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음’이라는 말처럼 담론과 예술가들을 연결하는 이음선이 형성되었으면 좋겠다.

 

김남수  장애 예술 씬(scene)이 만들어지려면 개념이나 명분이 아닌 구체적 실천이 앞서야 한다. 장애 예술이라는 제도와 담론 사이의 문화 지체 현상을 겪다가 씬 자제가 생성되지 못하고 소멸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2019년에는 글의 힘이 발휘되면 좋겠다. 장애 예술가들은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일단 예술가가 된 후에는 비평적 순환을 통해서 자기만족과 강화를 요청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여기서 “작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 있는 장애 예술가가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타자로 생각하면서도 그 타자로부터 자신을 구성해내는 작가, 그런 의미에서 먼저, 자기의식을 가진 장애 예술가가 쓰는 글이 필요하다. 연극의 역사를 보면, 연출가가 쓰는 비평적 관점의 글쓰기가 역사의 중핵을 구성해왔다. 마찬가지로 장애 예술가의 글을 통해 장애 예술이 주체화되는 과정이 있었으면 한다. 그런 후에야 평론가가 그 솟구치는 시간성을 타고 가는 동행이 긴요해지리라 본다. 단지 ‘장애 예술’을 정의하려고 하고, 부질없이 개념 정립을 시도하는 공회전의 시간으로 서로 싸우는 게 아니라 동시대의 예술이란 지평이 막다른 끝에서 어떻게 평론의 힘을 드러낼 것인가 라는 입장에서 새로운 시도가 함께 이루어지면 좋겠다. 그리고 비평과 담론의 현실화에는 원고료가 현실화되면 좋겠다. 원고료가 지난 십 년 이상 너무 안 올랐다.(웃음)

 

안경모  2017년부터 평가위원으로서 장애 예술을 접하면서 내가 알지 못하는 예술의 영역을 발견했고 나를 자극하는 여러 현상을 보게 되었다. 오늘 그런 부분을 장애 예술이 기존 예술계에 던지는 자극, 파열, 빛나는 순간, 솟구치는 시간 등으로 정리하게 되는데, 2019년에는 이것이 더 많이 전파되고 공유되면 좋겠다. 또한, 반대급부적으로 여전히 ‘할 수 있다’에 몰두하는 측면과 그것이 장애 예술가들의 내적인 자기실현에 기여하는 다양한 가치를 부여해 주셨다. 이런 다양한 혼재 속에서도 장애인을 대상화하는 한계에서 주체로 전면화하는 과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성과들을 다양한 네트워크, 소통, 매개를 통해서 이어가면 좋겠다. 그러면서 장애인 예술 활동에서뿐만 아니라 비장애 예술 활동에도 긍정적인 부분이 생기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정리. 프로젝트 궁리 

사진. 이재범 POV스튜디오(andy45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