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배리어프리가 창작의 기본값이 되기까지

감각의 전복 이후, 넓어진 세계

글. 이래은 연출가

 

올해 봄, 연극 <녹색광선>(정민지 작)을 만들며 처음으로 배리어프리를 시도했다. 나는 공연에서의 ‘배리어프리’라는 것을 재작년에서야 처음으로 알았고 단 한 번도 내가 참여하는 공연에 적용해야겠다고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갑작스럽게 왜 그래야겠다고 생각했을까, 찬찬히 돌이켜봤다.

 

일단 나의 SNS 친구들이 떠올랐다. 몇몇 분의 SNS 페이지를 통해 지체장애인, 농인, 중증장애인의 글과 자주 만나게 됐고, 낯섦이 사라지고 익숙해지자 공기처럼 그냥 모든 게 자연스러워졌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능력 차별적, 장애 차별적 단어를 많이 쓰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장애인 예술을 종종 접했던 것도 큰 영향을 주었다. 종종 관람했던 극단 애인의 공연은 장애에 대한 나의 일상과 예술의 감각을 서서히 바꾸어주었다. 그리고 작년 미투(#Me_Too) 이후, 지금껏 살아오면서 쌓였던 폭력과 차별, 그리고 젠더에 대한 감각이 전복되었고, 나와 같은 경험을 한 수많은 타인의 목소리와 내 전복된 생각과 감각의 시간이 쌓이고  쌓여, 어느 날, 문득, 임계점을 넘었던 것이었다. 임계점을 넘은 그 순간, 배리어프리는 내게 기본값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번 공연은 당연히 배리어프리를 합시다”라고 작업자들에게 제안은 했지만, 막상 현실을 만나니 주춤하게 되었다. ‘예산이 없는데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예산 없이 어설프게 하면 그게 더 차별을 만들어 내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과 함께 나중에 예산이 있을 때 제대로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문득 어떤 영상에서 보았던, 한 대통령 후보와 그의 지지자들이 성소수자를 향해 말했던 “나중에”라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나중에’라는 것은 ‘없다’라는 말과 같고, 영영 누군가의 존재를 지우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냥 하기로 했다.

 

이 긴 얘기는 장애인의 예술 접근성에 대해 실제 창작에서 어떤 관점이 필요한지 이야기하고 싶어서 꺼낸 것이다. 의미 있어서, 사회에 필요해서, 장애인에게 도움이 되니까 등등의 이유에서가 아니라, 배리어프리는 사회와 예술의 기본값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기본값에 닿기 위해선 예술가 자신의 세계가 넓어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온 감각에 쌓이고서 하는 것이 아니라면, 오만한 시혜나 기껍지 않은 의무가 될 수 있고, 그것은 오히려 존중 없는 차별이 되고 말테니까. 그리고 비장애 예술인은 자신이 비장애인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획득한 권력에 대한 냉철한 인식을 수반해야한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장애인을 대상화 하게 될 것이고 이후 문제 제기를 받게 되면 억울해 할 것이다. 남성이 사회에서 비남성이 아님으로 인해 획득하고 있는 권력을 냉철히 인식하지 않을 때, 여성, 소수자 차별이나 혐오를 하고서도 의도한 게 아니었다며 억울해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배리어프리 공연을 준비하면서 몇 가지 고민이 있다. 평생을 비장애인으로 살아온 내가 알지 못하는 장애인의 세계를 내 경험으로 추정하거나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가에 대한 끊임없는 점검이 필요한데, 점검의 깊이가 성찰과 비장애인 동료들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장애 예술인 동료와 어떻게 하면 협력하며 예술 창작 작업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예술의 정치적 올바름을 확인해주는 자문으로서만 동료 장애 예술가를 만나는 것은 넘어서야 하지 않나 하는 고민을 갖고 있다. 이 글을 쓰면서, 이 고민을 지금 작업을 함께 하는 장애 예술인 동료와 더 나누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른 고민은, 수많은 장애의 언어를 어떻게 다 담아낼 것인가 하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예술창작의 목적이 배리어프리라면 가능하겠지만, 내 작업은 그런가? 내가 참여하고 있는 공연은 세상에 무슨 질문을 하고 있는가? 그 질문은 배리어프리를 목표로 하고 있는가? 이런 생각을 하며, 한 공연 안에 모든 장애의 언어를 담아내 배리어프리를 구현해내겠다는 것도 내 과한 자의식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공연마다 고유의 언어가 있고 질문이 있고 그것을 담아내는 장애의 언어도 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모두를 만날 수 있는 보편적 배리어프리의 환상 같은 게 내게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게, 겨우 두 번째 배리어프리 공연을 준비하면서 주제 넘는다는 생각도 또한 번뜩 든다.

 

또 다른 고민은 어떻게 하면 장애인 관객들과 공연장에서 만날 수 있는지 홍보와 기획 차원에서 비롯된다. 첫 번째 배리어프리 공연을 할 때, 적극적으로 홍보하지 못 해서기도 하지만 농인, 맹인 관객은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예술가의 힘만으로는 장애인 관객 모객은 한계가 있다. 누구와 어떻게 협력하면 더 많은 사람이 배리어프리 공연을 누릴 수 있을까. 이 질문을, 이 서툰 글을 고맙게도 읽어주신 당신과 함께 생각해보고 싶다. 

 

두 번째 배리어프리 공연 준비를 함께 하고 있는 스태프 한 분이 이런 말을 했다. 배리어프리를 준비하는 동안 상상력이 늘었다고. 상상이 늘고 세상이 넓어지는, 사회와 예술의 기본값 배리어프리. 공연 연습 중인 오늘도, 비장애인으로서 획득한 권력에 둔감해지지 않도록 온 감각을 곤두세우고서 기꺼이 그리고 즐겁게 배리어프리를 준비하고 있다.  

이슈1_필자

이래은
청소년, 여성, 소수자의 이야기가 담긴 공연을 만드는 연극연출가이다. <날개,돋다> <실 끝에> <서른,엄마> <고양이가 말했어>를 작/연출했으며, 연출작으로는 <묵적지수>(서민준 작) <녹색광선>(정민지 작) <우리는 적당히 가까워>(이오진 작) <고등어>(배소현 작) 등이 있다. 
blunarcat@naver.com

 

메인사진. <녹색광선>
사진제공. 이래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