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왜 포용적 예술인가

모두에게 포용적인 미술관은 가능한가

글. 백기영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부장

 

지난달 몇 주 간에 걸쳐서 앨리스 폭스(Alice Fox) 교수(영국 브라이튼대학교)와 8명의 장애, 비장애 예술가들의 <포용적 예술 워크숍>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진행됐다. ‘포용적 예술(inclusive arts)’은 우리에게 아직 다소 생소한 개념이다. 앨리스 폭스 교수는 “이 분야에 학습장애 및 비학습장애 예술가 간 창의적 협력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개념”이라고 했고, 애나 커틀러(Anna Cutler) 테이트모던 학습센터장은 “‘포용적 태도’를 가진 예술가들이 장애 예술가들과 이어가는 ‘예술 대화’”라고 덧붙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장애인을 복지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국가정책은 최근 들어 확대되고 있지만, 장애인의 문화예술적 창조 활동에 대한 정책은 아직 많이 부족한 상황이다.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이 설립되면서 장애인을 문화예술 활동의 주체로서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확대하고 다양한 형식의 워크숍 및 세미나를 마련하며 장애인 문화예술 활동에 관한 쟁점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미술관에서 일하고 있는 필자의 입장에서 고백하자면, 우리나라 국공립미술관에서 장애 예술가들의 활동을 다루는 전시나 프로그램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각 기관이 장애 예술가에 관한 경험이 부족하고 이들과 어떻게 대화할 수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만큼 이번 <포용적 예술 워크숍>이 지향하는 바, 장애-비장애 예술가들이 함께 모여서 나누는 ‘예술 대화’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워크숍 내부에서 여러 가지 쟁점이 드러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구체적인 이야기는 다음 호에 참여자를 통해서 들어보도록 하자!)

 

지금까지 문화기반 공공시설에서 장애와 관련된 문제는 장애인들의 관람환경이 갖추어졌는지 여부였다. 이는 「장애인 차별 금지법」 안의 문화예술 관련 규정이 장애인의 문화향유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들은 문화예술 안에서 소극적인 관람자이고, 공공기관의 의무는 이들의 여가로서 문화향유 활동을 돕는 차원에 머물러 있다. 그러다 보니 미술관들은 장애인들이 무심코 방문했을 때, 그들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여부를 따지는 매우 소극적인 차원의 조치만 하면 됐다.

 

니나 사이먼은 그녀의 책 『참여적 박물관』에서 공공기관의 관람객을 개인화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지역의 장애 관련 기관과의 협력이나 구체적인 기관 운영의 자문 등을 통해서 지역 커뮤니티 당사자들이 기관의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라고 조언한다. 한편, 최근에 출간한 『연관성의 예술』에서 그녀는 “연관성을 추구하기 위해 우리는 열린 마음의 내부자를 길러야 한다. 새로운 사람들을 열렬히 환영할 수 있는 내부자, 새로운 경험을 기뻐할 수 있는 내부자 말이다. 내부자가 외부자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은 그들이 새로운 문을 만들 수 있도록 하는 도움이다.”라고 했다. 우리가 말로는 공공기관이라면서 실질적으로는 열려있는 기관이 아니라, 기관의 내부자로서 외부자들을 행해 문을 닫고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킨 것이다. 일반인 관람객을 향해서도 이와 같은 상태라면 하물며, 의사소통이 쉽지 않은 장애인들을 향해서 열렬히 환영하는 공공기관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이번에 진행한 앨리스 폭스 교수의 <포용적 예술 워크숍>은 2016년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에서 최태윤이 기획했던 <불확실한 학교>를 떠올리게 한다. 이 학교 또한, 장애-비장애 예술가들이 함께 참여해서 비엔날레 기간 중에 운영되었다. 최태윤은 이 프로그램에서 “미술관은 ‘평생 가는 학교’다!”라고 말했는데, 그는 미술관에 지역사회의 장애인이나 소수자들이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누구나 편안하게 지속해서 무언가를 배우고 참여할 수 있는 학교로서의 기능을 요청했다. 그가 기획했던 학교는 여러 장애를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일시적으로 운영되었던, 매우 불확실한 것들이 많은 학교였다. 이 일시적인 플랫폼은 관람객 혹은 참여자들을 보다 주체적으로 동참하게 했다. 미술관은 이들이 일시적으로 소통하는 공간으로서 기능했고 이들은 함께 무언가를 굳이 배우려고 하지 않았고 또 창작했으며 함께 만든 결과물을 전시로 만들어 일반에게 공개하기도 했다. 여기서는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불확실했다. 관람객과 미술관의 입장도 명료하게 나뉘지 않았다. 이 수업은 모두 수화와 문자 타이핑으로 통역되었으며 디지털 테크놀로지로 대표되는 컴퓨터 프로그램 코딩을 통해 미디어 이론이 표방하는바 인간의 감각 확장이 아니라, 인간 감각의 결핍과 결여를 보충해주거나 상호 보완하는 기술을 도출해내는 과정을 경험할 수 있었다. 여기서 ‘상호의존’은 불완전한 고유의 아름다움과 그것을 포용할 가능성에 관한 것이라고 했다. 최태윤은 기획 글에서 “상호의존의 잠재력은 각자가 혼자였을 때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던 것들이 공동의 역량으로 가능해지는 데에 있다.”고 썼다. 

 

오늘날 동시대 미술은 다양한 것들을 포용하면서 자기 영역을 확대해 왔다. 앨리스 폭스 교수는 “포용적 예술은 아웃사이더 예술, 사회적 참여 활동, 장애인 예술, 예술치료 및 현대 예술의 다른 형태와 구분된다. 또한 모든 협력자 및 청중에 대해 이 작품은 사회적으로 변형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열려 있다.”고 했다. 그만큼 앨리스 폭스 교수는 상호적인 대화의 과정에 집중하고 있다. 이렇게 무한히 포용적인 태도가 이 프로젝트를 난해하게 만드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또 이 포용적인 태도조차 장애 예술가들을 외부적인 시선에서 바라본 것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필자는 지난 2012년 경기도미술관에서 일할 당시, 발달장애 예술인들의 전시 《다른, 그리고 특별한》을 기획한 적이 있었다. 미국의 크리에이티브 그로스 아트센터(Creative Growth Art Center)와 일본의 민들레의집 하나아트센터가 함께해서 만든 이 전시를 성사시킬 수 있었던 것은 우리나라 장애 비장애 협업 콜렉티브였던 ‘로사이드(RAWSIDE)’ 덕분이었다. 이 전시가 끝나고 크리에이티브 그로스 아트센터는 한층 더 성장했으며, 지난 2017년 57회 베니스 비엔날레에는 댄 밀러(Dan Miller)와 쥬딧 스콧(Judith Scott)의 작품이 초청되었다. 전 세계를 대표하는 비엔날레에 작가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이 비엔날레는 예술감독인 크리스틴 마셀(Christine Macel)이 내세운 주제인 “예술 만세!(Viva Arte Viva)”에 적합한 작품으로 장애 예술인들의 작품을 주목했다. 

 

그렇다면, 한국의 경우는 어떤가? 전시가 끝나고 7년이 지난 지금, 로사이드에는 많은 예술가가 함께 다양한 활동을 지속했지만, 이제는 모두 떠나고 함께했던 발달장애 예술가들만 여기저기에서 간헐적으로 만나는 상황이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공공성의 이름으로 얼마나 더 포용적일 수 있는가 하는 본질적인 질문이 남는다. 이것은 특히, 공공기관이 아닌, 선량한 개인의 포용적 열정에 의지하고 있는 한국의 장애 예술인 현장에서 필자가 느끼는 갈등이다.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과 서울시립미술관이 함께 협업한 이번 경험이 지속해서 미술관의 포용성을 확대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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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영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서 회화를 독일 뮌스터 쿤스트 아카데미에서 영상미디어를 전공하였다. (사)미술인회의 사무처장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각예술 다원예술 소위원을 거쳐 의재창작스튜디오와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 디렉터를 역임했다. 경기문화재단이 운영하는 경기창작센터와 경기도미술관 그리고 북부사무소에서 일하면서 예술가들을 위한 창작환경과 제도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해왔다. 현재는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kpeik69@seoul.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