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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좌담] 2019 우리가 만난 장애 예술의 빛나는 순간

제3의 영역을 ‘발견’하고 당사자성을 ‘발현’하기

김월식, 송현민, 안경모, 허명진

올해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에서는 다양한 장애인 예술 작품, 행사, 교육 등을 지원했다. 또한 웹진 [이음]을 통해 장애 예술의 다양성과 가치를 공유하고자 노력했으며, 모두가 손쉽게 장애 예술을 접할 수 있도록 장애인 문화예술 정보 플랫폼을 준비 중이다. 

어떻게 해야 장애 예술만의 색깔과 목소리를 찾아낼 수 있을까. 어떤 프레임으로 바라보아야 장애 예술의 다양한 언어와 이야기를 드러낼 수 있을까. 2019년을 갈무리하고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기 위하여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지원사업 평가위원으로 활동한 네 분의 전문가와 함께 현장에서 발굴·발견한 시선과 앞으로 주목해야 할 지점, 기대와 한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개요
일시
2019년 12월 13일(금) 오후 3시~5시
장소
토즈 마이스 혜화센터
참석자
김월식(다사리문화기획학교 교장, 무늬만커뮤니티 디렉터),
송현민(음악평론가), 안경모(연출가), 허명진(무용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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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모  올해 장애 예술 작품을 보면서 스펙트럼이 대단히 넓어지고 있다고 느꼈다. 생활 예술적인 아마추어리즘부터 장애 예술의 가치를 발견하고 현실적인 대안을 고민하는 범위까지 우리 사회에서 장애가 갖는 다양한 위상만큼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있는 것 같다. 예전에는 장애에 대한 편견, 장애를 만들어내는 환경, 장애 인식개선 등 소재나 주제에서 분노와 저항이 주로 보였지만, 최근에는 ‘나’라는 정체성 자체를 그대로 자긍심이나 자존감으로 전환해가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그로 인해 장애 간의 연대성이 조금씩 틈을 만들고, 지점들을 찾고 있는 것 같아 인상적이었다. 두 번째로 느낀 점은 포용에 대한 부분이다. 포용적 작업은 일반학교의 통합학급 등 학교 예술교육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올해는 아직은 초보적인 단계이지만 예술교육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공연 현장에서도 포용적 작업을 시도하려는 움직임이 많이 보였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장애를 나에 의해 발현되는 수평적 정체성으로 여기고 이를 문화예술적으로 확장하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선천적인 장애가 아닌 경우 인간적인 교류를 통해 나의 정체성을 커뮤니티로 확장해나가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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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월식  작년부터 발달장애에 관련된 작품을 관심 있게 보았다. 발달장애인 작업의 시그널, 작품 기제는 무엇인가가 가장 궁금했었다. 부모님의 권유나 선생님의 지도를 관성적으로 이어받아서 하는 것인지, 진정 본인이 좋아서 하는 것인지 등 작업을 시작하는 계기가 궁금했다.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지원사업 안에도 상당히 놀라운 팀이 많았다. 이런 팀들의 성과와 가치를 우리 방식으로 읽어주어야 한다. 긍정적인 마인드 또는 편협한 마인드로 다층적으로 읽어줄 수 있는 객체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또 하나는 장애 예술에서 윤리성을 어디에 배치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윤리적 긴장감이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서 다양한 접근과 해석을 할 수 있다. 이걸 바꾸지 않으면 대한민국 전체, 특히 지역에서 선한 시혜성 또는 복지적 접근 방식을 넘어서는 창작이 나올 가능성은 없다. 윤리를 해석할 수 있는 자기 방식을 인정해줘야 한다. 세 번째, 매개에 대한 고민을 안 할 수가 없다. 장애인 문화예술 매개자는 지역 문화 매개자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양성되어야 한다. 결국 매개자들의 장애 예술에 대한 이해가 장애 예술 활동을 닦아내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예술이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게 매개의 지점이다. 장애와 예술에 대한 자기 질문을 만들어가는 것, 타자가 장애와 예술을 어떻게 다루는지 이해하는 것. 이 두 가지를 잘 생각할 수 있는, 한발 더 나아가 실천의 과정으로 이끌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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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명진  당사자성에 대한 자기 질문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기 질문에 깊이 들어갈 힘은 아직 부족해 보인다. 무엇보다도 기존의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해외 장애인 무용단 안무가의 워크숍에서 ‘발레는 파시즘이다’라고 지적했는데 과연 그 현장에 있던 참가자들이 귀담아들었을지는 잘 모르겠다. 여전히 춤은 장르 문법에 기대거나 음악에 맞춰야 하는 등의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다. 워크숍에서 보여준 대안적 접근은 사실 장애와 비장애 상관없이 최근의 춤에서 나타나는 주요한 태도와 연결되어 있다. 이는 시·공간의 현재성이나 몸의 조건에 대한 인식, 환경과의 상호작용 등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한 접근이 특별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아직은 관습적 접근을 선호하는 것 같다. 또한 청각장애 무용수의 경우 들리지 않는 상태에서 환경과 몸으로 반응하는 감각이 놀라웠는데, 잘 맞춰서 한다는 게 중요하다기보다 그 자체가 고유 리듬이 되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자기 질문의 단초는 보이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다양하게 볼 수 있는 시각을 가진 매개자, 작업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런 계기를 충분히 더 만들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통합적 접근의 시도 혹은 그것을 표방하는 시도가 더러 나타나는데, 이는 단순히 장르적 구분의 넘나듦의 문제가 아니다. 몸과 그것이 처한 조건에서 비롯된 문제의식과의 접속이 우선이라고 본다. 그럴 때 어떤 요소들이 달라붙어도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좀 전에 언급한 대안적 접근과도 상통하는 면이 있는데, 장애의 영역에서 더욱 유효한 관점이 아닌가 한다. 

 

안경모  여전히 비장애인의 시선에서, 표준화된 인간형을 전제로 장애를 바라보는 현상이 너무 많다. 일차적으로는 가치 있는 정보가 빨리 확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해외사례를 통해 ‘우리도 할 수 있는 거네’ 하는 차원이 아닌 그 저변에 깔린 뿌리를 발견해야 하는데 뿌리는 발견하지 않고 현상적으로만 접근하니까 구체적인 실천으로 전환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철학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 계속 동어반복만 하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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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민  최근 들어 장애 예술과 생활예술 지원이 더 활발해지는 것 같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과 함께 열렸던 패럴림픽을 기점으로 관심 유도를 위한 캠페인이나 프로그램은 많이 늘어났지만, 장애 예술가에 대한 공감대는 여전히 미흡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장애 예술가들이 모여 있는 곳에는 여전히 많은 지원이 이뤄지고 있지만, 그들이 사회와 함께 어우러지는 것에서는 미흡하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 다른 예를 들고 싶은데, 그중 첫 번째는 9월에 있었던 생활예술 오케스트라 축제였다. 취미로 하는 생활예술 음악가들이 축제를 통해서 미비하지만 성장하는 것에 희열을 느끼고 즐거워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 축제의 하이라이트였던 폐막식에는 서울시향 전문단원 15명을 포함한 100명의 연합 오케스트라가 나왔는데, 이 모습을 보면서 프로 예술가의 개입이 보여주기 식이라 할지라도 성장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장애 예술가·단체에 비장애인 전문 예술단체의 긍정적인 개입이 있을 때 그런 경험을 통해 상향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두 번째 사례는 ‘공명’의 송경근 음악감독이 쇼케이스 공연에 장애인 국악그룹 ‘땀띠’와 함께 했다. 장애 예술가와 함께한다는 점을 내세우진 않았지만 ‘땀띠’와 ‘공명’이 오랜 시간 함께하며 신뢰와 시간 쌓기를 잘한 사례라고 생각되었다. 제도가 아닌 개인적인 유대관계에 의해서 누적되고, 긍정적으로 발휘된 사례가 아닌가 생각했다. 이러한 지원사업이 현실적으로 다양화되었으면 좋겠다.

 

협업, 관점과 문제의식의 충돌과 시너지

김월식  장르적 특수성을 고려하더라도, 협업의 과정에서 장애 예술에 대한 문제의식 없이 준비되지 않은 채 장애 예술가와 비장애 예술가가 만나는 것은 사업을 위한 사업이 되기 쉽고 위험한 부분이 있다. 컨템퍼러리 아트 신(contemporary arts scene)에서 급진적(radical) 예술가들은 장르를 다 내려놓는데 장애 예술가들은 자꾸 장르를 입는다. 그렇게 가면 안 된다. 장애 예술을 특정 지을 이유가 없다.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춰 형식에 치우치지 않고 내용에 중심을 두었으면 좋겠다. 장애 예술도 삶과 붙어있고 삶이 가진 예술적인 부분을 읽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예술 작업에서 이런 루틴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발달장애나 자폐의 특성 같은 것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안경모  장애·비장애의 서로 다른 감각을 충돌시켜서 시너지를 만들어보자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장애나 비장애의 특성에 의해서 서로가 어떤 감각을 더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사유는 없다. 그러다 보니 일반론적인 인식개선 류의 작업으로 그치게 되는 것이다. 정말 중요한 건 비장애인의 입장에서 장애 예술이 독특한 감각을 표현하고 있다고 느낄 때, 기존의 비장애 중심의 예술계를 파열시켜줄 때 비로소 장애 예술의 가치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그런 부분에서 미술의 경우는 대단히 선도적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송현민  미술이나 무용처럼 표현 중심의 장르에서는 새로운 게 나올 때가 있는데, 음악은 재현(재연) 중심이기에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는 경우가 미술이나 무용에 비해 드물다. 음악 분야는 좀 상황이 다른데, 작품보다는 앙상블이나 오케스트라를 구성할 수 있는 솔리스트 발굴이 더 가능성이 있다고 느껴졌다. 그들이 개인의 기량을 바탕으로 작은 실내악 그룹으로 만들어나가려는 청사진을 그리기도 하더라. 이런 개인을 많이 발굴하는 것이 음악 분야에서는 더 의미 있겠다. 

 

김월식  우리가 에이블 아트나 포용적 예술로 얘기하는 것들은 예술로 다가가기 위한 방법론, 어쨌든 위계성을 가지고 있는 프레임이다. 예술지향적이지 않을 때 생기는 예술, 삶의 가치관이 예술성을 뛰어넘은 부분을 예술적으로 읽어주는 매개자가 필요하다. 아쉽게도 현재의 장애 예술은 너무 지독하게 예술지향적으로만 가고 있다. 이것을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것들을 자꾸 보여줘야 하고 제3의 영역에서 이것을 읽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안경모  그것은 단지 장애·비장애의 문제가 아니다. 생활예술 매개나 예술교육에서도 예술가들은 참여자에게 일상에서부터 시작하라고 하지만, 정작 참여자들은 일상이 아닌 ‘예술’을 하고 싶어 한다. 이것이 장애 예술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것 같다. 비장애인 입장에서는 다른 감각과 시점으로 예술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던져주는 등 ‘달라서 가치롭다’고 이야기하지만, 장애인은 ‘다르지 않음’을 강조하며 표준화된 예술로 가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어긋남을 포용하려고 하니까 비틀어지는 것이다. 방향성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인식하고 이야기해야 해결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김월식  방향성이 다르더라도 교차하거나 만나는 지점은 반드시 있다고 생각한다. 뇌병변 작가이자 안무가이자 기획자인 문승현 작가는 《장애와 도시와 건축의 상상여행 展》에서 그 방향성을 맞췄다. 선사랑 드로잉회 20명의 회원과 함께 도시건축학자 정기황 씨와 서울에 있는 미술관 박물관 10여 곳을 방문했다. 그리고 이 시설을 다시 재생한다면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인가를 설계하고 그림을 그렸다. 발달장애 작가들의 전시 《양평 폐공장 전시회 SPRING》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느낌이 생생하게 보이는 설치 감각이 돋보였다. 발달장애인의 이미지를 굿즈를 넘어서 명품화하려는 시스플래닛의 상업적인 프로세스도 세련됨, 꼼꼼함, 영리함에서 멋졌다. 신재환 작가는 조각을 하는데, 요즘 다른 작가들은 모형만 만들어 기술자들에게 맡기지 힘든 돌조각을 직접 하지 않는다. 이 친구는 그 작업을 왜 하는지 동영상을 보고 알게 되었다. 청각장애인이라서 시끄러운 소리를 인식하지 못하고 몰입하여 작업하는 모습을 봤더니 먹먹함이 밀려왔다. 이러한 제3의 영역을 발견하고 번역하고 읽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허명진  문승현 작가가 기획으로 참여한 다른 작업을 봤는데 그 자신이 작가이기도 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당사자의 시점과 감각에 밀착되어 있을 뿐인데 그 때문에 기존의 예술형식이나 개념이 달리 보이게 되는 측면이 있다. 초현실주의적인 이미지나 텍스트의 충돌 기법이 오히려 그들의 삶과 일상 차원의 감각에 접근하도록 끌고 들어가는 게 흥미로웠다. 장애의 몸과 감각에 면밀해지는 시각이나 태도에서 이러한 여지가 생기는 것 같다. 이는 당사자냐 아니냐의 문제와도 관련이 없다. 그럴 때 심지어 가장 고전적인 접근에서도 다른 가능성과 틈이 열림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존재를 부각하는 ‘장애의 커밍아웃’

송현민  음악이나 전통예술 분야에서는 아직까지 그런 면을 발굴하지 못한 것 같다. 해외에는 좋은 사례가 많다. 예를 들어, 이명 현상이 있는 작곡가가 고전음악을 들리는 대로 새롭게 작업한 것이었다. 원곡과 어떤 지점은 묘하게 닮아있지만, 어떤 지점은 이 예술가만의 감각으로 표현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작업을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볼 수 없다. 예전에 미국 현대미술관에서 시각장애인 작곡가가 도자 예술가, 설치 예술가와 협업한 것을 보았는데, 작곡가가 조각품을 만져보고 그 느낌을 곡으로 쓰고 전시할 때 그 음악을 틀었다. 촉각의 이해를 음악으로 표피화한 거다. 음악교육에서 창작 기반이 적고 연주가 중심인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협업 구조를 기대할 수 없을 뿐이며, 그 관문을 거쳐 온 장애 예술가들에게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걸 어떻게 표현 중심으로, 또 장애 음악가들의 시선을 통해 새롭게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이 든다. 

 

안경모  음악에서도 청각장애로 인해서 높은 음역, 낮은 음역대만 들리는 식으로 본인이 해석한 음악성이라는 게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기존에 발견하지 못한 음악적 필터링을 거치는 것이고 대단히 흥미로운 예술행위일 텐데 왜 이런 것들이 발현되지 않는지 안타깝다. 연주 중심이라고 하더라도 같은 악보를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음악을 구현할 수 있지 않을까.

 

송현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양 음악사에 흥미로운 작품이 많이 나왔다.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전쟁으로 오른팔을 잃었다. 작곡가 모리스 라벨은 그를 위해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썼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이런 곡은 환영받지 못한다. 본인이 가진 아픔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다. 

 

안경모  저는 그것을 ‘장애의 커밍아웃’이며, 앞으로 장애 예술이 가는 과정에 있어서 중요한 실마리라고 본다. 올해 <사랑 및 우정에서의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에 관한 법률>에서 김원영 변호사가 휠체어에서 내려와서 옷을 갈아입는 전 과정을 노출하면서 본인이 가지고 있는 지체장애를 관객에게 커밍아웃해버렸다. 사회적인 태도로서 감춰주고 싶었던 장애의 영역을 관객에게 오픈하는 과정을 통해서 장애를 긍정적으로 전환시켜주고,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하게 되는 중요한 디딤돌처럼 느껴졌다. 한편, 장애인문화예술판의 <이 동네 개판 5분전>에서 아이러니하면서도 흥미로웠던 점은 뇌성마비 배우들이 본인의 신체성을 활용하여 좀비 역할을 했다. 비장애인이 했다면 장애 혐오적인 느낌이 들 수 있겠지만, 당사자인 장애 예술가가 직접 하니 혐오를 오히려 반전시키고 뒤집어 한걸음 더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장애를 있는 그대로 노출함으로 인해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실존자로서의 존재를 강하게 부각시켜주는 점이 중요하게 보였던 것 같다.

 

허명진  그것은 일종의 ‘공백’을 만들어내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장애를 드러내고 선언하는 돌발적 사건을 통해 주체자가 구성되고 보편성이 가능한 공간을 열어놓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행위를 통해 가치가 없다고 여겨졌던 것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다. 이음 해외 쇼케이스에 초청되었던 뇌성마비 안무가 댄 도우(Dan Daw)의 경우도 그런 점에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양말 신는 것조차 한참 걸리는 그의 몸이 옷을 입기까지 거치는 과정을 그대로 대면하게 되면서 익명적이고 불확실했던 영역, 끝없이 논쟁거리가 되는 비결정화된 영역을 포함하고 용인해야 하는 상황이 오게 된 것이다. 

 

송현민  모리스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피아니스트가 연주할 때 객석에서는 그가 사용하지 못하는 오른팔을 보게 된다. 잘못된 전쟁으로 인해서 장애를 갖게 된 피아니스트의 비극을 정면으로 바라보라는 의미가 있다. 

 

안경모  지금껏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평균화·표준화되어있는 예술관 또는 인간관에 국한되어 바라보았다면, 장애 예술은 ‘인간은 기본적으로 개별자-개별적 실존자’라는 의미를 계속해서 얘기해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면에서 발달장애는 사회화 자체가 장애의 요건인데, 예술교육을 하면서 억지로 사회화시키려고 애쓰는 것이 의아하게 느껴졌다. 집단 군무와 합창에 계속 밀어 넣고, 줄 세우고, 튕겨 나가면 또 데려와서 줄 세우고, 그걸 화합이라 포장하고 박수치는 것이 이상하다. 예술 프로그램 안에서 아이들이 각자 관심 있는 행동을 하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각자의 독특한 감각, 시선, 세상을 가지고 있으니 그걸 마음대로 드러내 보여주는 게 장애 예술의 가치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음악에서도 장애라는 새로운 시선 속에서 펼쳐 보일 수 있는 장을 만들고, 그걸 매개해줄 수 있는 매개자들이 적극적으로 해줄 수 있다면 기존 음악계에도 파열이 생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허명진  ‘듣다’라는 프로젝트 같은 경우가 음악에서 시도되어야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노경애 안무가가 지난해부터 청각장애 작가, 사운드 아티스트 등과 협업한 작업이다. 그때는 청각장애의 대체 감각을 찾는 과정에서 비장애인이 생각하지 못했던 차원의 발견을 하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지점이 있었다. 올해는 좀 더 깊어져서 ‘듣는다’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까지 들어가는 게 보였다. 청각장애 자체도 듣는 범위나 방식이 다 다른데 비장애인 또한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인가’ 의문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장애·비장애 상관없이 ‘듣는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이 프로젝트에 시각장애 음악가도 참여했다고 하는데 클래식을 하는 분들이라 처음에는 이런 작업을 굉장히 낯설어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올해는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모노, 스테레오 등 음과 공간에 대한 작업을 선보였다. 이런 식으로 협업을 시도하다 보면 음악 분야에서도 어떤 변화의 가능성이 생겨나지 않을까 싶다.

 

송현민  요즘 현대음악 작곡가들이 그룹전을 많이 하는데, 그러면서 장애 음악가와의 워크숍을 통해서 새로운 소리를 발견할 수도 있다. 어떤 첼리스트는 연주를 하지 않을 때는 손가락으로 계속 현을 튕기는 습관이 있다. 모두가 쉬는 부분에서 그 소리를 들으면 어떤 긴장감이 맴돈다. 이러한 장애 음악가의 버릇이나 장애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습관들이 예술적인 문법으로 녹여 넣을 수 있는,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예술적인 각주를 달아줄 수 있는 평론이 들어가면 새로운 소리를 충분히 발굴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은 더 많은 샘플을 보여주고 상상력을 제공하는 텃밭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가치 있는 축적, 발굴된 시선의 공유

안경모  연극 분야만 보자면, 장애 당사자 입장에서 예술을 하기 위한 기본적인 정보 자체가 너무 적다. 드라마 텍스트 중심의 작품을 보면 극작술이나 공연의 완성도 면에서 텍스트 자체의 수준이 낮다. 현상적인 퍼포먼스 텍스트로 드러난 공연물에서도 그 안에 담겨있는 담론이나 주제를 극성으로 구성하는 방식에서 부족함을 많이 느낀다. 이런 부분은 외부적인 수혈이든, 자극이든, 충돌이든, 계속해서 접촉함으로써 가치 있는 정보가 자신의 축적물로 누적되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는 해외 장애인 연극 희곡집을 읽으며 느낀 것이지만, 장애 당사자성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독특한 체계와 감각이 ‘발견’되는 것이지, 자생적으로 ‘발현’되고 있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하면 장애 당사자성에 따른 ‘다른’ 감각체계와 신체성을 다른 사유로까지 이어지게 만들 수 있을까. 멘토링뿐 아니라 극작이나 퍼포먼스 워크숍 등 계속해서 예술 활동을 자극해 줄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김월식  안경모 선생님이 말씀하신 장애 예술의 알고리즘이 한눈에 드러날 수 있도록 한 가지 사례라도 정확하게 연구되었으면 좋겠다. 한편, 이런 것은 정책적으로 지원이 안 되는구나 느끼도록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리스크가 얼마나 큰지는 모르겠지만 좀 과감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허명진  이음 해외 쇼케이스를 올해 처음 시도하기도 했지만, 해외뿐 아니라 국내에서 발견되는 참고할 만한 사례가 공유될 기회가 많이 주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장애 예술에서 어떤 또 다른 가능성과 모색들이 있는지 의미 있다고 평가된 사례들을 현장에서 자꾸 접하다 보면, 조금씩 다른 여지가 생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재공연이나 재발표의 기회 부여뿐만 아니라 좀 더 발전되면 페스티벌의 형태 등 일종의 플랫폼 조성이나 제공의 역할을 해나가야 할 것이다. 한편, 현장에서 발굴된 시선이 공유될 수 있도록 기록하는 것도 중요할 것 같다. 담론을 만드는 작업, 담론이 가질 수 있는 역할, 현장에서 발견되는 지점을 놓치지 않게 하는 장치들이 필요하다. 

 

안경모  장애 예술뿐 아니라 비장애 예술에서도 마찬가지이긴 한데, 예술 자체가 하나의 자본적 상품이 아니고서는 그 담론이 흩뿌려지는 경우가 생긴다. 공공에서는 그런 것들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에 대해 해석해주고, 포착해주고, 구축해줘야 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수많은 장애 예술가들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계속해서 축적하는 것이 아카이빙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졌으면 좋겠다. 그들의 활동 사례를 하나의 작품 영역으로 확장시켜주는 작업이 필요하다. 장애-비장애, 예술인-비예술인들도 함께 소통할 수 있는 영역으로서의 평론, 모니터, 의견도 계속해서 축적돼서 나중에는 장애 예술이 아닌 예술계 전반으로의 이동이 필요하다. 

사회.  오세형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사업운영팀장 

정리.  프로젝트 궁리 강지영, 남은정

사진. 이재범 POV스튜디오(andy45a@naver.com)